서울법대 망국론(亡國論)

2022.11.22.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기사입력 2022/11/23 [09:57]

서울법대 망국론(亡國論)

2022.11.22.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입력 : 2022/11/23 [09:57]

#1,  <육법당(陸法黨)을 아십니까?>

 

주로 노태우 정권 때 유행했던 정치권 용어로 육법당(陸法黨)이 있었다. 육사와 서울법대를 합친 게 '육법당'이다. 개각(改閣)을 할 때마다 대통령의 직계 후배인 육사 출신이 너덧 명 들어가고, 마찬가지로 서울법대 출신 관료나 교수가 대여섯 명 포함되어 이들 두 그룹만으로 각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깡치있는 기자들이 정면 비판은 뭉개면서 자조적(自嘲的)으로 한 조어(造語)였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을 통틀어 한 대학의 단과대학에서 가장 많은 장관을 배출한 곳은 어디일까? 숫자를 헤아려 본 적은 없지만 단연코 서울법대일 것이다. 이 대학은 사시(司試)와 행시(行試)에서 압도적인 합격자를 내고, 이들은 법조와 관료사회의 중추로 커나간다.

 

서울법대는 국무총리 배출에서도 단연 1위이다. 역대 총리는 44 명. 한덕수 총리가 48대이지만 장면, 백두진, 고건, 한덕수 씨가 총리를 두 차례 했기 때문에 역대 총리 수는 44 명이다. 이 중 서울법대(경성제대 포함) 출신이 9 명이다. 신현확(13대), 진의종(17대), 노신영(19대), 현승종(24대),

이회창(26대),

이수성(29대),

이한동(33대),

김황식(41대),

이낙연(45대) 총리가 그들이다.

 

▲     ©가디언21

 

이들 중 5년 간(1998~2003)재임하며 '인민의 총리'로 불리고, 국민의 진정한 사랑을 받았던 중국의 주룽지(朱鎔基) 총리 같은 인물이 하나라도 떠오르는가. 주룽지 총리는 재해(災害)와 큰 사고가 있는 곳이면 가장 먼저 인민복 차림으로 달려가서 국민들을 위로하고 즉각적인 정부대책을 지휘해 '현장 총리',  '인민복 총리'라 불렸다. "그가 나타나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서울법대 출신 총리 중에 주룽지 총리의 옆에라도 갈 만한 따뜻하면서도 책임총리로 해야 할 말 다 했던 '국민의 총리'가 한 명이라도 떠오르는가.

 

#2. <갈봉근, 한태연 교수의 곡학아세(曲學阿世)와 DJ의 '박정희 영구집권 획책' 예언>

 

박정희 대통령의 시월유신(十月維新)은 1972년 10월 17일 이루어졌다. 이는 1970년 11월의 노동자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1971년 4월의 제7대 대선, 그리고 1971년 8월의 광주(廣州)대단지사건 등에 크게 놀란 박정희가 장기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단행한 탈법적, 초헌법적인 비상조치였다.  학자들은 보통 이를 '유신쿠데타'라고 부른다. 

 

시월유신의 핵심은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과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의 헌법기능 수행 등을 규정한 유신헌법이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조차도 발표 며칠 전에야 통보받았다는 유신헌법을 누가 기초했느냐는 데에 큰 관심이 모아졌었다.

 

이제 거의 정설로 굳어진 사실이지만 유신헌법 기초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맡은 인물은 갈봉근(葛奉根) 당시 중앙대 법대 교수(1932~2002)였다. 그는 서울법대 출신으로 독일 본(Bonn) 대학 법학박사였다. 공법학자인 그는 독일의 파시스트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를 공부해 유신헌법을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 파견근무 중이던 '법꾸라지'라는 별명의 김기춘 검사 또한 유신헌법 기초에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또한 서울법대 출신이다. 서울법대 교수를 역임한 뒤 당시 민주공화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거쳐  변호사였던 법학자 한태연 씨(1916~2010)도 유신헌법 기초의 토대를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져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대표적 학자로 비판받았다. 그는 5.16 군사쿠데타 후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기초한 곡학(曲學)의 전과가 있었다.

 

이들은 시월유신 이후 모두 보상을 받았다. 갈봉근 교수는 9, 10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했다. 일본 와세다대 출신인 한태연 교수도 9, 10대 유정회 의원을 연임했다. 김기춘 검사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승승장구했다.

 

시월유신 헌법개정은 안보와 남북관계를 앞세워 사실상 영구집권을 획책한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의 비극적 흑역사이다. 김대중 제 7대 대선 후보는 유세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번에 또 집권하면 총통제 등으로 영구집권을 꾀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시월유신의 핵심인 유신헌법 기초와 작성에 서울법대 출신인 갈봉근과 김기춘이 핵심적으로 관여했고,  서울법대 교수를 역임했던 한태연도 적극 가담했으니 순수한 학문을 지향한다는 고고한 상아탑(象牙塔)으로서의 서울법대는 굴곡의 한국 현대사에서 도대체 무슨 짓들을 한 것일까.

 

#3. <서울법대 득세(得勢)에 묻는다. '서울법대 망국론'을 아는가? >

 

대통령이 서울법대 출신인 현 정권의 장관 중에서 최근 언론의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두 장관이라면 이상민, 한동훈 두 장관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국민 여론조사라도 해보면 아마도 불호감(不好感)이 가장 높은 각료일 것이다. 이 둘 말고도 현 내각과 청와대 및 금융감독원 등 주요 정부기관에 서울법대 출신이 얼마나 포진해 있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겠다. 이미 '검찰공화국', '검찰 제국'이 된 것을 대다수 국민이 알고 있는데, 그걸 계산하다가는 울렁증이 생길 것 같아서이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일찍이 운동권에서 열심히 노력했던 필자의 두 친구가 있다. 이들은 서울법대의 유명한 운동권 써클인 '농법회' 출신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고시공부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부류(部類)였다. 지금 어떤가? 그 중 언론과 정치권에서 활동했던 친구는 현실정치에 절망하다 7년 전 병사(病死)했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친구도 매우 쓸쓸한 노년을 지내고 있다. 둘 다 고시공부 등 출세와는 담을 싼 삶이었다.

 

그런데, 같은 서울대 중에서도 서울법대는 학생운동과는 비교적 거리가 먼 곳이다. 1970년 대 초만 해도 이신범(李信範)씨 주도로 <자유의 종>을 발간하는 등 그런대로 움직임이 있었고 문희상 전 국회의장처럼 서울법대 재학 중 학생운동을 맹렬하게 했던 분도 드물게 있지만, 언제부터인지 운동권에서 서울법대는 희미해졌다.

 

서울상대만 해도 분위기가 좀 다르다. 故 김근태 김병곤과 함께 심재권 손학규 장명국 등 운동권의 별들이 쉽게 떠오르는 데 비해 서울법대에서는 故 조영래 변호사와 민청련의 이범영, 박석운 노동문제연구소장 외에 별로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필자의 과문 탓일까. 박정희, 전두환의 철혈 군사독재정권 시대에도 정권에 저항한 세력은 찾아보기 힘들고, 정권에 찰싹 달라붙어 일신의 영달(榮達)을 꾀한 무리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서울법대 망국론'이 나오기도 했었다.  노태우 정권이 끝난지 30 년이 지난 오늘 이 시점에서 서울법대에 대한 그런 평가를 수정해야 할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다수 선량한 서울법대 출신을 비난하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다. 다만 권력에 협력하고 아부해 현실에서의 출세 만능주의를 즐기고 조장하는 일부 서울법대의 이런 오만한 흐름이 옳은가 묻고 싶은 것이다. 이런 흐름은 언젠가 민중의 엄청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찍이 독일의 법철학자 게오르크 예리네크는 "법은 도덕의 최소한도"라고 말했다. 법이 만능인 듯 흘려넘치고,  법치주의가 필요 이상으로 난무하며, 법조인이 지나치게 설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사회 선진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국민은 때로 바보같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영민하고 현명하다. 조용히 있어도 알 건 다 안다. 전두환의 5공화국 때 "내각 위에 육사, 육사 위에 여사(이순자)"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지금 시중에는 "누구 위에 여사, 여사 위에 법사"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대통령 기자회견실에 가림막이나 칠 때가 아니다. 큰 위기이다. 집권 반 년여 만에 이런 빨간 경고등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겸허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여 국정의 일대 쇄신을 도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가 담보되지 않는다. 국민은 임금인 배를 엎을 수도 있다(君舟民水).  

 

친구, 벗, 동료들이 시위하고 감옥 가고 고문 받고 역사에 희생할 때 도서관과 절간에 들어앉아 사법고시, 행정고시, 입법고시에 매달렸고 그 시험 합격증서 한 장으로 평생 고관대작,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 역할을 해왔다. 그런 숱한 서울법대 출신들에게 이 시  한 귀절을 들려주고 싶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 중에서).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청와대 춘추관장/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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