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애시(最愛詩) 몇 편

탁상용 달력의 3월 '10일'이 없다. 까맣게 먹칠을 했기 때문이다.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03/28 [19:39]

나의 최애시(最愛詩) 몇 편

탁상용 달력의 3월 '10일'이 없다. 까맣게 먹칠을 했기 때문이다.

가디언21 | 입력 : 2022/03/28 [19:39]

▲ 김기만 전 청와대춘추관 관장 ©가디언21

제 책상 위에 놓여있는 KOBACO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탁상용 달력의 3월은 '10일'이 없습니다. 까맣게 먹칠을 했기 때문입니다(사진 1).

 

그런 분들이 적잖이 계시겠지만, 제게 3월10일은 악몽(惡夢)입니다. '한국의 트럼프'(K-Trump)가 등장한 날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은 끔찍한 날입니다. '블랙 써스데이'(Black Thursday, 검은 목요일)였습니다.그래서 까맣게 칠했습니다. 

 

더 묻지 마시고, 이런 제 심정과 동류항(同類項)인 분들을 위해서, 제가 영육(靈肉)이 가라앉을 때, 가슴 밑바닥에서 건져올려 낭송하는 최애시(最愛詩) 몇 편을 소개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시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입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가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두번 째는,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입니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세번 째, 네번 째 시는 노동시인 박노해의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같은 제목으로 두 편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왜 같은 제목의 시가 두 편인지 잘 모릅니다. 혹시 누가 아시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억하기 쉽게 1,2편으로 나누어 외웁니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1.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에서 단 하나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고통이 가치없이 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고통 앞에서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헛된 위안을 택하겠는가

쓰라린 진실을 택하겠는가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우정은 절망보다 강하다

희망은 패배보다 강하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2.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 것도 두려워마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 것도 두려워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마지막 시는 제게 친누님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길의 도반(道伴)같기도 한 차옥혜 시인의 <시월 햇빛 밝은 길에 내가 있다>입니다.

 

 작년에 펴낸 시집 '말의 순례자'에 들어있는 최신작입니다. 이 시를 낭송하면 살아있다는 것의 축복? 감사?ᆢ 그런 게 복받쳐서 결국 눈물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최루탄(催淚彈)인 셈이지요.

 

눈부시게 환한 시월 길에

내가 있다

햇빛이 나와 길을 껴안는다

햇빛이 반짝인다 

내 몸에서

햇빛이 반짝인다 길에서

내가 반짝인다 

햇빛 속에서

길이 반짝인다 

햇빛 속에서

시월 햇빛 쏟아지는 길에

내가 살아있는 

축복이여

기쁨이여

내가

시월 햇빛의 

꽃이 되는 순간이여

시월 햇빛이 내게 스민다

내가 시월 햇빛에 스민다

내가

시월 햇빛에서

빛이 되는 찰나여.

 

* 추신: 동네 작은 도서관에 책보러 갔는데,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포스터, 유인물, 메모지 등이 많아서 감동했습니다.

(사진 2)

우크라이나는 차이콥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 그리고 세계 3대 피아니스트의 하나인 호로비츠(Horowitz)의 나라입니다. 신이여, 우크라이나를 지켜주소서!

 

(사진1)

▲ 책상 위에 놓여있는 KOBACO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탁상용 달력의 3월10일은 없다.     ©가디언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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