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자 소현과 올빼미 그리고 병자청란

늦깍이 감독 17년 영혼 갈아넣은 첫 작품 대박
세자 소현과 비정•무능한 부왕 인조간 얽힌 잔혹 스토리
자식에게도 열패감 가진 조선 최악의 군주 인조
청년세자 소현은 병자호란아닌 병자청란이라 여겨

이기창 기자 | 기사입력 2022/12/11 [19:37]

청년세자 소현과 올빼미 그리고 병자청란

늦깍이 감독 17년 영혼 갈아넣은 첫 작품 대박
세자 소현과 비정•무능한 부왕 인조간 얽힌 잔혹 스토리
자식에게도 열패감 가진 조선 최악의 군주 인조
청년세자 소현은 병자호란아닌 병자청란이라 여겨

이기창 기자 | 입력 : 2022/12/11 [19:37]


개봉 2주만에 누적관객수 2백만 명을 돌파한 영화가 있다. 올빼미다. 유혜진•류준열 더블 캐스팅  주연 영화로 어두운 곳에서만 앞이 보이는 침술사가 조선왕조 6백년 사에서 사도세자와 더불어  비운의 세자로 불리는 청년세자 소현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가 주요 테마다.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허용을 적절히 브랜딩해 완성 시킨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연일 사람들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몰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육상효 감독은 올빼미의 떡상에 얼떨떨하단 반응을 내놨다. 육감독은 대중에게 선보인 영화 올빼미가 감독 메가폰 잡고선 처녀작이다. 비록 왕의  남자 등 작품에선 부감독으로 역할을 했지만 이후 메가폰을 잡았던 10편의 작품이 번번히 무산  됐다. 이에 좌절을 느낀 육감독은 영화계를 떠나  회사에 취업도 했지만 시나리오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영화계를 떠난 방황속 17년의 열정이 마침내 영화 올빼미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었다. 

 

한편 육백년 조선의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함께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34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극속 주인공이다. 비록 올빼미같은 영화나 책속이긴 하지만 청년세자를 만날 때마다 과거는 물론 현재  진행형인 굥정권 수구(守狗) 검찰의 사냥감 몰듯한 물어뜯음에 가녀린 날개를 퍼덕이며 맞섰거나 맞서고 있는 용감한 이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늘 기자의 가슴을 후벼팠다. 소현세자와 관련된  가장 큰 의혹은 올빼미의 메인 테마인 그의 죽음  이다. 유력설은 선왕인 인조에 의한 독살(毒殺)설 이다. 비운의 왕세자 소현은 부왕(父王)의 손에 의해  안타깝게도 비명횡사를 당했다는 것이다.  소현은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반정으로 권좌에 등극한 후 14세에 세자에 책봉된다. 하지만 곧바로 병자호란 겪으며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다. 비록  패망국 볼모였지만 소현세자는 한 나라의 왕세자답게 흐트러짐없이 언제나 당당했고 항상 배우고 익히기를 쉬지 않았으며 백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가슴속 깊이 품었다.

 

한 번은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에게 조선의 외교문제를 따지며 무례하게 대하자 소현은 용골대를 다음과 같이 엄하게 꾸짖었다. "내 비록 귀국의 볼모지만 일국의 세자요. 장군이 어찌  이토록 나와 내 조국을 겁박하는 것이요.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린법. 두렵지 않으니 당장 예를  갖추시오" 중국 심양 지역 왕들과 장수들은 점차  소현 세자의 이러한 성정과 용기에 감동해 시나브로 그를 존경했다. 특히 용골대는 청년세자의  인품과 자질에 반해 그를 청나라 황제를 모시듯  깍듯이 대했다. 소현세자는 또한 독일인 신부 아담 샬과 친했다. 파란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를 통해 알게된 천외천(天外天) 사상과  서양 문물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아담샬도 세자를 소중히 여겨 서양 천문학 등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 기구를 선물로 세자에게 건네 주었다. 이로서 소현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됐다.

 

비록 조국인 조선에선 오랑캐 취급을 했지만 청나라 파워를 실감한 청년세자는 청이 서양에서 받아들인 선진문물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조선도 서양과 청국의 새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병자호란(胡亂)이란 명칭도 오랑캐를 뜻하는 호(胡) 대신 나라이름 청(淸)을 붙여 병자청란이라 부르길 주장했다. 이처럼 소현은 비록 억류된 신분이었지만 대국을 컨트롤하는 등(等)거리 국제 외교에 능숙했고 서양 문물에 눈을 떴으며 사고를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전환한  최초의 조선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 리외교에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집권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에 강한 의심의 눈초리를 품었다. 특히 부왕 인조는 아들 소현의 병자청란이라 여기는 이런 생각에 극혐해 아들을 향해 면전에서 벼루까지 집어던졌다. 왜냐  하면 인조의 저열한 협량(狹量)속엔 청황제 홍타이지에게 당한 삼전도 굴욕의 앙금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조의 저열함은 소현 뿐 아니라  며느리 강씨도 왕좌를 위협한다고 여겨 왕으로선 해선 안될 졸열(拙劣)한 행위를 일삼고 결국 두 내외와 손자들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소현의 정적들은 그가 청국의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조차도 부왕을 내쫓고 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고자 한다는 각종 가짜뉴스를 조작해 퍼뜨렸다.  이러한 중상모략질에 편승한 인조는 청이 자신의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겁박할까봐 늘 두려움에 전전 긍긍했다. 다시 말해 국왕으로서  나라통치에 자신감이 완전히 결여됐다. 14대 임금 선조가 이순신에게 느꼈던 열패감(劣敗感)을  인조는 자기 아들인 소현세자에게 느꼈던 것이다. 자식한테까지 앙심과 열등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인조가 한나라의 왕깜량이 한참 모자란 선조와 함께 조선 최악의 군주란 증거다. 무능력자를 지도자로 뽑아 권좌에 앉혀 놓는 일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고 뼈져리게 끔찍한 일인지 우리는  MB와 503을 통해 엄청난 댓가와 희생을 치르고서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굥석열을 지도자로  뽑았다. 밝음의 명(明)역사는 반복이 매우 드물다. 하지만 오욕의 흑(黑)역사는 반복이 잦다. 굥통을 비롯한 현 굥정권 위정자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흑역사속 원흉들임을 가슴에 손을 얹고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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