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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마리아인'만으로는 안된다?ᆢ:가디언21

착한 사마리아인'만으로는 안된다?ᆢ

2022.09.16.

2022-09-18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성경 누가복음 3장에는 착한 사마리아인(The Good Samaritan) 얘기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예리코)' 성을 넘어가다 강도를 당해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이를 지나가다 본 이스라엘인 부자, 제사장(목사, 사제), 서기관(관료) 등 세 부류는 주위를 살피다 슬쩍 피해갔다. 이 때 나타난  '사마리아인 천민(賤民)'이 이를 구해주었다. 강도를 당한 유태인과 구해준 사마리아인은 평소엔 불가불의 적대관계였다.

 

이런 연유로 '정의를 행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 정도의 '착한 사마리아인'이 전 세계적으로 자연스럽게 쓰인다.

 

필자는 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고귀한 뜻을 일찍 깨우치고 이를 스스로 실천하는 것은 물론, 이런 뜻을 같이 하는 공동체를 만드셨던 선각자 차유황(車有晃,1918-2000) 선생(목사, 원래는 교사, 사회운동가)의 손에 이끌렸다. 그리하여 고교 1학년이던 1969년부터 54년 째 <사마리탄>(Samaritan)이라는 이름의 써클활동을 해오고 있다.

 

일찍이 김수환 신부님조차 "추기경이 되어서도 삶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고민했었다"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칠순이 가깝고 사마리탄 써클 생활을 반세기 이상 하고 있음에도 봉사, 희생, 자선을 기본으로 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삶에 단 1%라도 미치는지 전혀 모르겠다. 턱도 없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하다.

 

오늘 오후 방송(cpbc 평화방송) 출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좋은 컬럼을 읽었다. '카톨릭평화신문'에 '4월의 책' 출판사 안희곤 대표(바오로)가 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사진1). 선물이라는 생각될 만큼 구구절절 가슴에 닿았다. 

 

"어쩌면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분이 계시구나"라며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귀절들은 이런 것들이다.

 

<중세 교회의  주요 기능은 자선시스템을 통해 빈민과 장애인을 구제하는 일이었다. 혹시 우리의 교회는 여전히 중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나의 자선이 혹시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적 동기를 가진 건 아닌가? 나의 자선과 기부가 혹시 이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기보다 더 오래 지속한 데 봉사하는 건 아닌가?>.

 

<이 잘못된 세상을 지속시킬 자선을 계속해야 하는가, 더 근본적인 개혁에 힘을 쏟아야 하는가?>.

 

고교 시절 故차유황 선생님은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 회퍼'를 가르쳐 주셨다. "미친 운전자가 과속으로 내리막 길을 달리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승객들이 끌어내려야 한다"가 답이라는 게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했다가 1945년 39살로 사형 당한 본 회퍼 목사의 신념이었다. 그리하여 종전(終戰) 3주 전에 처형되었다.

 

최근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The Good Samaritan Law)을 시행하는 나라도 있다. 프랑스 독일 핀랜드 등에서 자신이나 제삼자가 위험해지지 않는데도, 위험에 빠진 다른 사람을  구조하지 않을 때 처벌하는  법이다.

 

안회곤 님 컬럼의 백미(白眉), 마지막 한 구절이 천금처럼 다가온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근본적으로는, 강도를 잡아야 한다>.

 

어떤 강도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강도가 "승객과 함께 몰살하겠다"며 운전대를 내놓지 않고 버틸 때는 또 어찌할 것인가? 

 

31살 때 <나를 따르라>는 책을 써 불의에 맞서는 목사들을 독려했던 본 회퍼 목사 같은 자기희생적 큰 지도자의 한 마디 "외침"을 듣고 싶다. 

 

 




* 사진2, 야고보 바사노(16세기) 작, 사마리아인.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