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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물고문 사망' 특종한 윤상삼 기자 23주기, 묘소에 다녀와서ᆢ:가디언21

'박종철 물고문 사망' 특종한 윤상삼 기자 23주기, 묘소에 다녀와서ᆢ

35년 전인 1987년 1월 16일 치안본부.

2022-04-12     가디언21

이틀 전인 14일 사망한 서울대 인문대 언어학과 3년 박종철(당시 22.부산)군의 사인(死因)에 대해 강민창 치안본부장(당시54)이 브리핑에 나선다.

"그러니까는 조사관이ᆢ책상을ᆢ".  써준 원고대로 읽으면 되는데 강 본부장 은 더듬거리며 쩔쩔매는 모습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처원 대공(對共)수사처장(당시 58)이 나섰다. "기놈이 겁에 질려서 벌벌 떨고 있었는디,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응?... '억' 하고 쓰러졌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유행어가 된 "탁 치니 억하고"가 튀어나온 상황은 그러했다. 강한 이북 사투리 억양의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작품이다.

 

박종철은 그 이틀 전인 14일,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조사받던 중  사망한다. 불과 한 해반 전인 1985년 9월, '민청련'(民靑聯,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김근태 의장과 이을호 부의장 등 7명을 데려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팀이 23일 동안의 극악한 고문으로 반시체를 만들어 놨던 바로 그 곳이다. 당시 고문당했던 7명 중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해 지금까지 4명이 고인이 된 것을 보면, 고문이  얼마나 잔인하게 자행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물결을 바꾸어놓은 1987년 6월 항쟁은, 그 다섯 달 전에 있었던 박종철의 죽음에서 잉태되었다. 그 죽음이 '단순사'(單純死)가 아니라 끔찍한 '물고문'이었고, 치안본부가 이를 은폐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치안본부 책임자들이 하급 경찰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범행 경찰관을 바꿔치기 하려 했던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거의 모두 동아일보 법조팀의 잇딴 특종 기사로 밝혀졌다. 특히  국민 분노를 가장 크게 불러온 결정적인 장면이라 할 '물고문 치사'를 밝혀낸 게 바로  윤상삼(尹相參 기자.당시 만 30세였다. 

  

강민창 본부장은 기자회견 도중 엉겹결에 부검의(剖檢醫) 오연상 교수(당시 30, 전임강사) 이름을 말해버렸고, 기자들은 일제히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날라갔다. 

 

오 씨에 대한 경찰의 감시가 심한 것을 보고, 윤상삼 기자는 미리 화장실에 숨어든다. 우여곡절 끝에 화장실에서 동갑인 오 씨를 만난 윤 기자는 결정적인 증언을 듣게 된다. 역사를 바꾼 용기있는 증언이었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누워있는 시체(박종철) 내부의 폐에서도 수표음이 들렸다. 물고문 사망임이 분명하다>. 오 박사는 자신이 박군 가슴의 물기를 닦아냈으며, 강심제를  주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언론사에 기록될  동아일보의 대특종 <박종철, 물고문으로 사망>은 이렇게 윤상삼 기자에 의해 드러났다. 30살의 그가 펄펄 뛰는 날생선 처럼 온 몸으로 취재하던 때였다. 

 

역사를 바꾼 이 사건은 그 뒤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전과 충격을 계속 전해준다. 

 

경찰은 사건 은폐를 위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서둘러 시체를 화장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밖에도 양심적인 최환(崔桓) 서울지검 공안부장(당시 44.전주고-서울대 정치학과)의 '부검 강행' 방침으로 수포화된다. 

 

청와대, 안기부, 

대공수사처장 등의 거센 압력에 맞선 이 강골 검사는 '사체보존명령'까지 내려 부검(황적준 박사)을 강행했다. 그리고 나중에 윤상삼 기자 앞에 '부검결과서'가 담겨있는 서류상자를 슬쩍 놓고 간다. "나는 아부나 해서 출세하련다. 기자 똑바로 해"라고 능청을 떨면서. 

 

윤기자는 또 한번 큰 특종을 터뜨리게 된다. 최 검사는 그 뒤 서울지검장 때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했다. 검사를 그만둔 후에는 그 흔했던 '전관예우'를 거부하고 청빈하게 살고있다. 이런 검사도 있었다. 필자의 전주고 11년 선배이시다. 맘껏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또 이 사건 당시 1986년 '인천 5.

3사태' 주도 혐의로 영등포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당시 45. 전 동아일보 기자, '동아투위' 위원장. 현 '자유언론 실천재단' 이사장)은 옆방에 수감중이던 고문경찰관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다. 

 

이 전 의장은 평소 자신을 몰래 도와주던 교도관('비둘기'로 불림)을 통해 사건진상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에게  전하는 데 성공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7주기를 맞아 박종철 사건의 진상과 경찰의 은폐 시도 및 범인 바꿔치기 등을 모두 발표, 6월 항쟁의 또다른 전환점을 찍는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또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의 인기 기자칼럼이었던 

창(窓)에 <종철아, 잘 가그래이ᆢ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는 제목의 명창(名窓)을 남겼다.

 

윤 기자의 1년 후배인 황열헌 기자는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 씨(당시 58)가 임진강에 아들의 유골을 뿌리며 오열하는 모습과 부산 사투리를 그대로 옮겨 독자들을 울렸다.

 

박정기 씨는 아들의 고문사 이후 민주화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같은 해 6월9일 최루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고 7월 5일 숨진 6월 항쟁의 또 하나의 넋 이한열 열사(당시 21세, 연세대, 전남 화순)의 모친 배은심 씨와 함께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박 씨는 2018년 89세로 별세했다. 배은심 여사도 올해 1월 9일 운명하셨다. 

문재인 대통령, 배우 강동원, 김태리도 광주에 가 문상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다른 동료 2명과 취재한 윤상삼 기자팀은 1988년 영예로운 '동아대상'을 받았다. 한 해 모든 기사를 통틀어 최고의 기사에 주어지는 상이다. 

 

이후 민완기자로 명성을 떨치던 윤상삼은 1996년 약관 39세에 동경특파원으로나가 맹활약 하던 중, 1999년 간암이 발견되었다. 안타깝께도 4월 6일 아내와 두 딸을 뒤로한 채 42세로 별세했다.

 

윤상삼과 필자는 특별했다. 고향 전북 후배(익산, 남성고-연대 신방과)로 동아일보 

1기 후배이지만 나이는 3살 어려 필자를 형처럼 따랐다. 특히 1987년 2월 필자 주도로 동아일보 노동조합 설립 준비를 비밀리에 시작할 때, 필자 입사동기조차 한명도 따라주지 않았을 때 맨 처음 필자의 손을 잡아준 고마운 후배였다.

 

그의 묘비명(epitaph)은 동아대상 수상 소감이다.

 

<기자가/그 때 그 자리에/있었다는 것보다/더 중요한 일이 달리 있을까/우리에게 주어진 동아대상은/짐이요 채찍질이다/그 채찍을 온 몸으로 느끼며/보다 철저한 기자정신과/깊은 역사의식으로/열심히 쫓아다니며/좋은 기사를 많이 쓸 각오다>.

1988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특종보도로 동아대상을 받은 수상 소감.

 

 사진1. 왼쪽이 윤상삼. 오른쪽은 영화 1987에서 윤 기자로 분한 배우 이희준.

 

▲ 사진2. 가장 오래 전 동아일보 기자 때 사진. 1988년 1월 29일 동아일보 노동조합 초대 간부회의. 맨 뒤 가운데 김종완 조합장, 바로 다음이 교육부장인 필자. 오른쪽 끝이 조직부장 윤상삼.   © 가디언21

 

▲ 사진 3. 記者 尹相參의 碑.  © 가디언21

 

▲ 사진 4. 윤상삼의 장녀 주현, 부인 엄영숙, 차녀 소현, 사위 박준영.  © 가디언21

 

▲ 사진 5. 윤상삼 가족과 필자.  © 가디언21

 

▲ 사진 6. 윤 기자 비에서의 필자  © 가디언21


*  원래 기일은 4월 6일. 윤 기자 딸들의 직장관계로 일요일인 10일 묘소를 찾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