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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주간'에 생각한다/왜 다시 '김대중 정신'인가?/DJ 生還상황 재구성/성 김 대사, 괜찮나?:가디언21

김대중 주간'에 생각한다/왜 다시 '김대중 정신'인가?/DJ 生還상황 재구성/성 김 대사, 괜찮나?

2022.08.15.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08/18 [09:14]

김대중 주간'에 생각한다/왜 다시 '김대중 정신'인가?/DJ 生還상황 재구성/성 김 대사, 괜찮나?

2022.08.15.

가디언21 | 입력 : 2022/08/18 [09:14]

지난 8월 12일자 페북 글을 통해, 고참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일본 납치에서 생환하신 8월13일부터 타계하신 18일 앞뒤까지 한 주간을 '김대중 주간', 혹은 'DJ 계절'이라고 부르자"는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짧은 글을 썼더니, 큰 어른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만 90세로 '동교동'에서는 권노갑 고문 다음의 연장자이신 이수동(李守東)선생이었습니다. 어쩌면 고향도 김 대통령님과 똑같은 신안군 하의도 후광(後廣)리였습니다.

 

이수동 선생과의 인터뷰 중  동교동 사저(私邸)에서 집안 구석구석을 돌봤던 두 분의 이름을 "오채록", "조기환"이라고 바로 부를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이 선생은 1963년 제 7대 총선(6.8 선거)을 앞두고 동교동에 합류한 왕고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기자들 눈에는 띄지 않았느냐?"고 묻자 "주로 집사(執事, Butler)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DJ를 납치, 감금해 호송중이던 '용금호' 위를 날던 헬기의 굉음(轟音)이 '큰 희망의 단초'로 들렸다는 DJ 선생의 말씀을 선생도 정확히 기억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두환과 또 다른 군부독재자 노태우를 사면, 용서했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한 용서와 화해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 합니다.

 

그래서  'DJ정신'을 표상하는 단어는 '통합', '평화', '용서', 그리고  (애국애민의)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DJ정신은 요즘처럼 정치판이 황폐해질수록 더욱 가슴 깊이 울림을 줍니다.

 

#1. <납치됐던 DJ의 生還 장면 재구성>

 

일본 동경 그랜드 팰리스호텔에서 납치된 8월 8일 이후 동교동을 교대로 지키다 13일 밤 DJ선생을 맞이했던 이수동,  박문수(朴文洙, 79, 당시 비서) 님은 그 날 밤 9시경 누군가가 마포구 동교동 178-1 집의 초인종을 계속 눌러 나가보니 집 앞 담장 위로 김대중 선생 얼굴이 보였다고 회고합니다.

 

이수동 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집안에는 이희호 여사와 그의 절친 후배인 김정례(金貞禮,전 보사부장관, 1927년 생)씨,  DJ의 동생 김대의 씨, 이수동 김옥두 박문수 비서, 그리고 집안 일을 돕는 앞의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은 초췌하고 피곤한 기색이면서도기품 있는 모습으로 

가족과 비서들에게 "나는 괜찮다"고 말씀하시고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따라들어온 이희호 여사, 김정례, 김대의, 이수동 씨에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살아올 수 있었다. 살아서 돌아왔으니 우리 모두 기도하자"며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이어 이수동 집사에게 "미국, 일본대사관에 전화해 생환을 알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김옥두 비서는 윤보선, 정일형 선생 등 원로들께 전화를 돌렸고, 박문수 비서는 언론사에 전화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새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동교동에 왔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동아일보에 전화해 알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중앙정보부(中 情)는 <K.T.공작>이라는 코드명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을 실행하고, 사건에 동원된 중정 요원들은 물론 납치에 동원된 3척의 배 선원들 취업까지 책임지는 등  사후 관리 또한 철저히 했다고 합니다(사진).

 

# <치밀했던 중앙정보부의 DJ 납치작전 'K.T. 공작'>

 

이제부터 나오는 얘기는 세상에 별로 공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필자는 <K.T. 工作要員 實態調査 報告>라는 제목의 18쪽짜리 비밀문건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기 7개월 여 전인 1979년 3월 10일에 작성된 이 문건은 <大統領 閣下께 報告 畢> 이라고 적혀 있고, 마지막 쪽에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당시 이후락(李厚洛) 중정부장이 8월 말에 한 서명도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사진).

 

이 비밀자료에 따르면 DJ는  동경에서 납치되어 바로 대판(大阪, 오사카)으로 옮겨졌습니다.

대판에서 며칠(미상)  머문 뒤 대통령님은 용금호(龍金號) 편으로 부산에 실려왔고, 다시 서울 안가(安家)로 와 이틀간 머문 뒤, 동교동 사저(私邸)로 옮겨졌습니다.

 

서울 안가에서 동교동으로 옮기는 작업은 "시모노세키(下關)영사 姜濟元, 국정원 5국 공항보안실 李暉潤 소령, 공작단 운전수 등 3명이 담당했다"고 적시되어 있습니다(사진).

 

앞에서 봤듯이 김대중 납치사건은 치밀하게 공작된 비밀작전입니다. 국정원이 실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공작요원 25명, 선원 21명의 취업까지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한 것을 볼 때, 이 납치사건은 국가원수의 지시로 이루어진  범죄가 명백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이 납치공작에는 국정원 해외공작국 공작단장 윤진원(尹鎭遠(1925년생) 대령이 두번 째 고위 책임자(전체 活 動責)로 참여하는데, 그는 1977년 8월 1급 관리관(일명 '흑색 공작관')으로 승진, 임명되었으며, 그 결재를 박정희 대통령, 이후락(李厚洛) 국정원장이 직접 했기 때문입니다(사진).

 

필자는 <박정희 지시- 이후락 연출- 이철희(李哲熙) 국정원 차장-김기완(金在權) 국정원 8국 해외공작관- 尹鎭元 8국 공작단장으로 수직 하강하는 이 납치사건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성 김, 그는 DJ 납치에 가장 깊이 관여한 人士의 아들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마저 해야 하겠습니다. 소수는 알고 계시지만 국민 다수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KT사건 관여 인사 일람표'를 보면 첫 번 째에 金基完(金在權) 주일대사관 공사(현장지도)가 나옵니다. 

그가 바로 中情의 위장외교관으로, '中情 8국 해외공작관'이었던 김재권이며, 성 김의 부친입니다.

 

성 김의 부친은 자신을 희생해 납치사건에 깊이 관여했지만, 결말이 껄쩍찌근해서였든지 귀국 다음 해인 1974년 옷을 벗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 갑니다.

 

초딩 3년 때 부친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중1 때 다시 미국에 간 성 김은 공부를 잘 해 로스쿨을 거쳐 검사생활을 하다가 외교관이 됩니다.

 

2011년, 부모가 모두 한국인의 자녀로 첫 주한 미국대사가 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고, 2017년에는 필리핀 대사에 부임했으며, 2020년 4월부터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와 미 국무부 대북(對北)정책 특별대사를 겸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성 김의 한국대사 부임에 개인적으로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의 행적 때문입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웬 연좌제(連座制)냐"고 나무라실 수도 있겠지만, 불과 49년 전에 대한민국 제1야당 총재를 외국에서 납치해 수장(水葬)하려 했던 흉악한 계획의 실행책임자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이 나라 대사로 오는 걸 그대로 용인해야 하는지 고심했습니다. 

 

이명박 정권 때인지라  청와대 수석 등 몇몇 지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재고(再考)를 권유했지만 이미 아그레망이 떨어진 뒤여서 효과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성 김은 서울 은석초등학교 3학년까지 같이 다녔던 국민의힘 정진석 의원과 친합니다. 그 때문인지 지난 4월 인수위 시절 정진석, 성 김, 조태용(현 주미대사)과 윤석열 당선자가 정 의원 집에서 식사하고 불콰한 얼굴로 나서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습니다(사진). 

 

이러면 안됩니다. 성 김은 미 국무부의 차관보 급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체신머리 깎이는 언행을 하면 외교가 어려워지고 국익이 날아갑니다. 정 의원도 그런 자리 만들면 안되고, 성 김 대사도 미리 알았으면 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나라경영이 까끔사리(소꼽장난)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 진 장관은 미국에 가서 바이든 대통령은 커녕 블링컨 국무장관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게 현실입니다. 성 김에게 너무 한국을 우습게 보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서 희 장군 같은 외교를 펼쳐도 쉽지 않은 복합위기 상황입니다.

 

# '김대중 정신'으로 돌아갑시다!

 

3전 4기 불굴의 의지로 만 74세 고령에 대통령에 취임하신 후광(後廣) 선생. 평생을 민주주의, 인권, 남북평화, 동서화해의 제단에 바치셨습니다. 옷깃을 다시 여밉니다.

 

"왜 다시 김대중 정신인가"를 공부하고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지난 6월 15일 남북정상 22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김대중 정치학교'를 열었습니다.

 

정규과정 제 1기'가 8월 16-17일 대통령님 생가(전남 신안군 하의도) 를 방문합니다. '김대중 주간' 등 여러 면에서 탁월한 날짜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현 정권의 국정(國政) 운영을 보며, DJ가 우리 현대사에 얼마나 소중한 정치가(Statesman, not politician)였는지를 거듭 절감합니다. 

 

여야 정파를 떠나 한국 현대정치사에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게 자랑스럽고 행복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13일, 생환기념일에 이은 15일 광복절. 거인(巨人)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을 외쳐봅니다.

 

그리고 18일, 서거 13주년 기념일에는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또 뵈올 수 있습니다.

 

'DJ주간'입니다. 거듭 옷깃 여미지만 마음은

설렙니다.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김대중 대통령 청와대 춘추관장/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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